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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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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가 마코토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을 10번 역임했다. 2세 때 부친을 잃고 정치에 입문하여, 운수대신, 자민당 간사장, 선거대책위원장 등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 고이즈미 내각에서 '저항 세력'으로 활동했으며, 굉지회(고가파) 회장을 역임했다. 2012년 정계 은퇴 후, 2020년 명예 회장직에서 사임하며 완전히 은퇴했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 헌법 개정 등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으며, 친중파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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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마코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Makoto Koga cropped 1 Yasuo Fukuda 20070925
원어 이름古賀 誠
로마자 표기Koga Makoto
정치 경력
직책운수대신
임기 시작1996년 11월 7일
임기 종료1997년 9월 11일
직책신도쿄 국제공항 담당 대신
직책종합 교통 대책 담당 대신
의회 경력
직책중의원 의원
선거구((구 후쿠오카 3구→)) 후쿠오카 7구
당선 횟수10회
임기 시작1980년 6월 23일
임기 종료2012년 11월 26일
개인 정보
출생일1940년 8월 5일
출생지후쿠오카현, 일본 제국
출신 학교니혼 대학 상학부 상업학과
배우자고가 슈쿠코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가토파→고가파→고가파)
전직오니마루 가쓰유키참의원 의원 비서
웹사이트고가 마코토 공식 홈페이지
기타 경력
직책[[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39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총재모리 요시로
임기 시작2000년 12월
임기 종료2001년 4월 24일
직책[[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초대 자유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총재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임기 시작2007년 9월 24일
임기 종료2009년 7월
직책[[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44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총재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임기 시작1998년 7월
임기 종료2000년 12월

2. 생애

wikitext

후쿠오카현 야마토군 세타카정(지금의 미야마시)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 중이던 아버지가 필리핀 레이테섬에서 전사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고가는 그 모습을 보고 정치가를 지망했다.

자민당 참의원 의원이던 오니마루 가쓰유키의 비서를 거쳐, 1980년 총선에서 구 후쿠오카 3구에 출마해 처음 당선되었다. 이후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후쿠오카 7구를 포함하여 10선 의원을 지냈다.

건설정무차관, 자민당 건설부회장, 중의원 건설위원장, 자민당 총무국장을 거쳐 1996년 제2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운수대신으로 첫 입각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명문 파벌인 굉지회(스즈키 젠코미야자와 기이치→가토 고이치 파)에 소속되어, 당선 동기인 가와사키 지로, 1기 선배인 시라카와 가쓰히코와 함께 가토 고이치의 측근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00년 가토의 난 때 당시 간사장이던 노나카 히로무의 의향에 따라 반(反) 가토 진영으로 돌아서 가토와 결별하고, 호리우치 파 결성에 참여했다. '가토의 난' 이후 노나카의 뒤를 이어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2001년 이후 고이즈미 내각 하에서는 도로공단 민영화 반대파의 핵심 인물로서, 노나카, 가메이 시즈카 등과 함께 '저항 세력'의 대표적인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도로족 의원으로서 도로 특정 재원의 일반 재원화에 반대했다. 한편, 고이즈미 측은 고가에게 재무대신이나 외무대신 등 중요 각료직을 제안하며 회유를 시도하기도 했다.[1]

2005년 우정 국회에서는 가메이나 와타누키 다미스케 등과 함께 법안 반대 움직임을 보였지만, 중의원 본회의 표결 직전 퇴장하여 기권했다.[2] 그 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변명서를 제출하고 공천을 받아 당내에 잔류, 당선되었지만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같은 해 12월, 도로족으로서의 유력한 권력 기반이었던 도로조사회장직을 이시하라 노부테루에게 넘겨주었다.

2006년 2월, 파벌 내 반대파와의 타협으로 니와 유야와 함께 고치카이 공동 대표가 되었다. 고이즈미 총리의 사실상 후계자인 아베 신조가 차기 총재로 유력시되는 가운데, 파벌 내에서는 니와, 야나기사와 하쿠오 등이 주도권을 다투면서 파벌이 통일되지 못했다. 결국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측근이었던 가토의 후계자인 다니가키 사다카즈, '사시의 회'를 결성하는 등 친분이 있던 아소 다로가 아닌, 파벌 방침에 따라 아베를 지지했다. 같은 후쿠오카현 출신의 중의원 의원인 아소와의 지역 대립 심화는 하토야마 구니오의 후임 선거(후쿠오카 6구)에서 고가 자신이 발언한 것처럼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베가 총재로 선출되자 "고치카이의 이념과 아베의 이념은 큰 차이가 있다"고 발언하며 거리를 두었다. 아베 내각 성립에 대한 논공행상으로 니와가 총무회장에 취임하면서 파벌을 떠나자, 니와-고가 공동 대표 체제에서 고가 단독 회장 체제로 전환했다. 언론도 이를 계기로 '고가파'로 명칭을 변경했다. 당선 동기인 오타 세이이치를 비롯한 파벌 내 간부 대부분과 젊은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자신의 선거대책위원장 취임 후에도 실권을 장악했다.

지역에서는 당 후쿠오카현 지부 연합회 회장으로서 당세 유지 및 확대에 힘썼다. 그러나 2006년부터 후쿠오카시기타큐슈시 시장 선거에서 정부·여당 추천 후보가 연이어 패배하자, "간사장이 즉시 사임했는데 내가 남을 수는 없다"며 2007년 2월 현 연합회 회장직을 사임했다. 후임은 하라다 요시아키 중의원 의원이었다.

같은 해 9월, 아베의 사임 표명으로 열린 2007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아소 다로와 마치무라 파의 후쿠다 야스오가 입후보했다. 고가는 "후쿠다 선생 쪽이 정치 신조가 가깝다고 생각한다"며 후쿠다 지지를 조기에 표명하고, 야마자키 파 및 타니가키 파 등과 연계하여 아소 포위망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9월 23일 총재로 취임한 후쿠다 야스오로부터 총무회장 취임을 제안받았지만, 선거 관리를 희망하여 선거대책위원장[3]에 취임하기로 결정되었다. 당 신임 임원 기자 회견에서는 '당 사역'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고가도 그 일원으로서 기자 회견에 참석했다. 고가는 선거대책위원장 취임 이유에 대해 "내가 적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4] 그러나 2008년 9월 후쿠다가 사임을 표명하고 200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아소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자, 고가는 아소 지지를 표명했다. 아소 집행부에서는 선거대책위원장에 유임되었다.

국정 선거에서 당 공천 후보 선정에 영향을 미치는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일각에서는 '뒷 간사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종래에는 선거 관련 당 권한을 총재·간사장 라인이 가지고 있었지만, 선거대책위원장이 당 삼역과 동격이 되면서 간사장으로부터 권한 일부를 빼앗는 형태가 불가피했다. 후쿠다 집행부에서는 이부키 분메이 간사장과의 권한 다툼이 주목받았다. 중의원 선거 자민당 후보자 조정과 관련, 신규 코스타리카 도입을 통한 해결에는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자민당은 거물 민주당 간부와 대결하는 일부 선거구에서 자민당 후보의 비례대표 상위 우대 조치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상대가 강하기 때문에 당선권 안을 부여하고 후보자를 공천하는 수법이 하나의 지혜로 행해져 왔지만, 당세를 확대하는 데 있어서 플러스가 되는가. 싸우지 않고 한 발 물러서는 측면도 있어,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2009년 도쿄도의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실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민당이 민주당보다 열세에 놓여 총선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고가는 대중적 인지도가 있던 히가시코쿠바루 히데오 미야자키현지사 등에게 입후보를 요청하며 여론몰이를 시도했다. 6월 23일 히가시코쿠바루 히데오에게 입후보를 요청했는데, 히가시코쿠바루는 전국지사회가 주창한 지방분권개혁 실시와 자신을 자민당 총재 후보로 옹립한다면 출마 요청을 수락하겠다고 밝혔다. 고가는 애매한 답변을 남겨 당내외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결국 도의회 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민주당에게 원내 1당 지위를 빼앗기는 참패를 당했고, 히가시코쿠바루도 지사회의 제언을 자민당이 수용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고가는 도의회 의원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선거대책위원장직 사임을 발표했지만, 아소는 중의원 해산 다음 날 고가를 선거대책본부장 대리로 임명하여 사실상 유임시켰다.

8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자민당은 유례없는 참패를 당했다. 고가는 후쿠오카현 제7구에 출마했는데, 민주당에서는 고가의 비서로 7년간 일하고 4선 야메시장을 지낸 노다 구니요시가 상대로 나섰다. 고가는 비례대표 중복 입후보를 포기하고 공명당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어 승리, 10선 의원이 되었다.[27] 하지만 아소가 선거 참패를 이유로 사임하자 고가도 선거대책본부장 대리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고가는 파벌 회장직을 유지하며 총재 선거에서 다니가키 사다카즈를 지지했다. 그러나 고치카이 소속 오노데라 이쓰노리가 입후보를 모색하다 고노 다로 지지로 선회하고, 스가 요시히데는 아예 고치카이를 탈퇴하면서까지 고노 지지를 표명하여 고가의 리더십에 타격을 주었다.

민주당 정권이 3년 동안 우왕좌왕하는 사이, 2012년 무렵 자민당의 여당 복귀가 확실시되었다. 다니가키는 지방선거와 참의원 의원 선거 승리를 기반으로 총재 재선을 희망하며 고가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가는 세대 교체를 주장하며 다니가키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표명했다. 결국 다니가키는 간사장 이시하라 노부테루의 출마를 이유로 총재 선거에 불출마했고, 고가의 반응에 분노하여 고치카이를 탈퇴, 새로운 파벌인 유린회를 결성했다.

중의원이 해산된 2012년 11월 16일, 고가는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28] 다음 날, 자신은 정계에서 은퇴하고 지역구는 비서인 후지마루 사토시에게 물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파벌 회장직은 기시다 후미오에게 양도하고 명예 회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어느 정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2020년 9월 말 명예 회장직에서 사임하면서 완전히 정계를 떠났다. 2020년 총재 선거 당시 고가와 불화를 빚고 있던 아소기시다에게 고가와의 관계 청산을 요구했지만, 기시다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29] 분노한 아소는 총재 선거에서 기시다 대신 스가를 지지했고, 스가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이는 파벌 내에서 기시다가 고가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불러일으켰고,[30] 고가가 "기시다 정권 실현을 위해 리스크가 커진 것 같다"며 스스로 사임한 것이다.[31]

2. 1. 초기 생애 및 정치 입문

고가 마코토는 후쿠오카현 야마토군 세타카정(지금의 미야마시)에서 태어났다.[26][27][28][29][30][31] 2살 때 제2차 세계 대전에 종군했던 아버지가 필리핀레이테섬에서 전사했다.[26][27][28][29][30][31] 이후 어머니가 혼자서 고가를 키웠는데 고가는 그 모습을 보고 정치인을 꿈꾸게 되었다.[26][27][28][29][30][31]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이던 오니마루 가쓰유키의 비서를 거쳐[26][27][28][29][30][31] 1980년 총선에 출마해 처음 당선됐다.[26][27][28][29][30][31] 지역구는 후쿠오카현 제3구였으며 소선거구제로 바뀐 이후에는 후쿠오카현 제7구에서 정치 생활을 이어나가 정계를 은퇴할 때는 10선 의원이었다.[26][27][28][29][30][31]

건설정무차관·자민당 건설부회장·중의원 건설위원장·자민당 총무국장을 거쳐[26][1] 제2차 하시모토 내각이 출범한 1996년에 운수대신으로 첫 입각했다.[26][1]

자민당의 명문 파벌인 굉지회 소속으로 의원 동기인 시라카와 가쓰히코와 함께 가토 고이치의 측근이었다.[26] 하지만 2000년에 가토의 난이 발생하자 당시 간사장이던 노나카 히로무의 의향을 따라 반가토파로 돌아섰고[26] 호리우치 미쓰오를 지지하며 굉지회를 이탈해 신재정연구회 결성에 앞장섰다.[26] 그리고 노나카의 후임으로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발탁됐다.[26]

2. 2. 중의원 의원 활동 (1980-2012)

자민당 소속 중의원 의원이던 오니마루 가쓰유키의 비서를 거쳐 1980년 총선에 출마해 처음 당선됐다. 지역구는 후쿠오카현 제3구였으며 소선거구제로 바뀐 이후에는 후쿠오카현 제7구에서 정치 생활을 이어나가 정계를 은퇴할 때는 10선 의원이었다.

건설정무차관·자민당 건설부회장·중의원 건설위원장·자민당 총무국장을 거쳐 제2차 하시모토 내각이 출범한 1996년에 운수대신으로 첫 입각했다.

=== 자민당 내 주요 직책 ===

자민당 건설부회장(1990년), 자민당 총무국장(1992년)을 거쳐 노나카 히로무의 후임으로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2000년). 2001년에는 자유민주당 도로조사회장에 취임했다. 2007년에는 자민당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 2009년에는 자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사임한 후, 선거대책본부장 대리에 취임했다.

=== 굉지회(고가파) 회장 ===

가토의 난이 발생하자 당시 간사장이던 노나카 히로무의 의향에 따라 반가토파로 돌아섰고 호리우치 미쓰오를 지지하며 굉지회를 이탈해 신재정연구회 결성에 앞장섰다. 그리고 노나카의 후임으로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발탁됐다.[26]

2006년 2월 파벌내 반대파와 타협하는 형식으로 니와 유야와 함께 굉지회 공동 대표가 되었다. 다만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사임을 밝힌 가운데 후임으로 유력시되던 아베 신조 지지 여부를 놓고 파벌내 주도권 다툼이 팽팽했다. 결국 고가는 가토의 후계자인 다니가키 사다카즈나 개인적인 친분이 깊던 아소 다로 대신 아베를 지지했다.

하지만 아베는 당선 이후 자신과 굉지회의 이념은 차이가 있다며 고가와 거리를 두었다. 반면 니와는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이 되었는데 관례에 따라 니와가 파벌을 잠시 이탈하자 고가는 니와·고가 공동 대표 체제를 고가 단독 대표 체제로 바꾸었다. 오타 세이이치 등 간부와 소장파 의원들의 지지를 얻은 고가는 당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한 뒤에도 파벌의 실권을 계속 쥐었다.

총재 선거에서 다니가키를 지지했다. 그런데 굉지회 소속의 오노데라 이쓰노리가 입후보를 모색하다가 고노 다로 지지로 선회하고 스가 요시히데는 아예 굉지회를 이탈하면서까지 고노 지지를 표명하여 고가의 리더십에 타격을 줬다.

2012년 총재 선거를 앞두고 다니가키는 지방선거와 참의원 의원 선거 승리를 기반으로 총재 재선을 희망하며 고가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가는 세대 교체를 주장하며 다니가키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표명했다. 결국 다니가키는 간사장 이시하라 노부테루의 출마를 이유로 총선에 불출마했고 고가의 반응에 분노하여 굉지회를 이탈해 새로운 파벌인 유린회를 만들었다.

중의원이 해산된 2012년 11월 16일에 고가는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28] 다음 날에는 자신은 정계를 은퇴하고 지역구는 비서인 후지마루 사토시에게 물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파벌 회장직은 기시다 후미오에게 양도한 뒤 명예 회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어느 정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2020년 9월 말에 명예 회장직에서 사임하면서 완전히 정계를 떠났다. 2020년 총재 선거 당시 고가와 불화를 빚고 있던 아소는 기시다에게 고가와의 관계를 청산할 것을 요구했지만 기시다는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29] 분노한 아소는 총재 선거 때 기시다가 아닌 스가를 지지했고 스가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이는 파벌 내에서 기시다가 고가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불러일으켰고[30] 고가가 기시다 정권을 실현하기 위해 리스크가 커진 것 같다며 스스로 사임했던 것이다.[31]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는 대(大)고치카이 구상이 있다. 이는 과거 고치카이의 흐름을 잇는 고가파와 타니가키파와 아소파가 재결집하는 구상이다. 또한 아소파를 제외한 형태로 고가파와 타니가키파가 재결집하는 중(中)고치카이 구상도 있다. 고이즈미 정권, 아베 정권 시대에는 정권과의 거리감으로 세 파벌이 일치하지 않았고, 같은 파벌 내부에서도 차이가 컸기 때문에 구상은 진전되지 않았지만, 후쿠다 정권 탄생에 즈음하여 고가는 타니가키와 함께 후쿠다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그 결과 대체로 두 파벌 내부가 결속되었다.

2008년 1월 16일에 고가파·타니가키파가 합류에 정식 합의, 5월 13일의 파티에서 정식 합류가 이루어졌다. 합병 후의 고치카이는 중의원 50명, 참의원 11명의 총 61명의 의원이 참가하여, 당내 최대 파벌인 마치무라파 (세이와 정책 연구회, 중의원 60명, 참의원 26명/총 86명), 제2 파벌인 쓰시마파 (헤이세이 연구회, 중의원 47명, 참의원 22명/총 69명)에 이은 제3 파벌이 되었다. 합류에 따라 구 고가파에서 고가가 회장, 오타 세이이치가 회장 대행에 취임. 타니가키파에서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넘버2 포스트인 대표 간사로, 아이자와 이치로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많은 언론에서는 중고치카이를 '''고가파'''라고 칭하고 있다. 2009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대패로 고치카이 소속 중의원 의원은 25명으로 격감했지만 (그 후의 총재 선거에서 스가 요시히데가 탈퇴하여 24명이 됨), 세이와 정책 연구회와 헤이세이 연구회의 당선자는 그것을 밑돌았기 때문에, 고치카이는 중의원에서 최다 자민당 파벌이 되었다.

=== '저항 세력'의 대표 주자 ===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일본도로공단을 민영화하고자 하자 노나카 히로무, 가메이 시즈카 등과 함께 격렬하게 반발하여 '저항 세력'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도로족의원이었던 고가는 도로특별재원의 일반재원화에도 반대했다.[26] 고이즈미는 재무대신이나 외무대신 등 요직을 대가로 고가를 포섭하려는 시도도 했다.

=== 2009년 총선 패배와 이후 ===

2009년 도쿄도의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고가가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실무를 맡았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민당이 민주당보다 열세에 놓였고 총선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고가는 히가시코쿠바루 히데오 미야자키현지사에게 입후보를 요청했으나, 히가시코쿠바루는 전국지사회가 주창한 지방분권개혁 실시와 자신을 자민당 총재 후보로 옹립을 조건으로 제시했고, 고가의 애매한 답변은 당내외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26]

결국 도의회 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민주당에게 제1당의 자리를 내주는 대패를 당했고, 히가시코쿠바루도 총선에 불출마했다. 고가는 책임을 지고 선대위원장직 사임을 발표했지만, 아소 다로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한 다음 날 고가를 선거대책본부장 대리로 임명하여 사실상 유임시켰다.

총선에서 자민당은 유례없는 참패를 당했다. 고가는 후쿠오카현 제7구에 출마, 민주당의 노다 구니요시 후보와 맞붙었다. 노다는 과거 고가의 비서로 7년을 일하고 4선 야메시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고가는 비례대표 중복입후보를 포기하고, 공명당의 전면적인 협력을 얻어 승리하여 10선 의원이 되었다.[27] 하지만 아소가 선거 참패를 이유로 사임하자 고가도 선대본부장 대리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고가는 파벌 회장직을 유지하며 총재 선거에서 다니가키 사다카즈를 지지했다. 그러나 굉지회 소속의 오노데라 이쓰노리고노 다로 지지로 선회하고, 스가 요시히데는 아예 굉지회를 이탈하면서까지 고노 지지를 표명하여 고가의 리더십에 타격을 줬다.

2. 2. 1. 자민당 내 주요 직책

자민당 건설부회장(1990년), 자민당 총무국장(1992년)을 거쳐 노나카 히로무의 후임으로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2000년). 2001년에는 자유민주당 도로조사회장에 취임했다. 2007년에는 자민당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 2009년에는 자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사임한 후, 선거대책본부장 대리에 취임했다.

2. 2. 2. 굉지회(고가파) 회장

가토의 난이 발생하자 당시 간사장이던 노나카 히로무의 의향에 따라 반가토파로 돌아섰고 호리우치 미쓰오를 지지하며 굉지회를 이탈해 신재정연구회 결성에 앞장섰다. 그리고 노나카의 후임으로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발탁됐다.[26]

2006년 2월 파벌내 반대파와 타협하는 형식으로 니와 유야와 함께 굉지회 공동 대표가 되었다. 다만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사임을 밝힌 가운데 후임으로 유력시되던 아베 신조 지지 여부를 놓고 파벌내 주도권 다툼이 팽팽했다. 결국 고가는 가토의 후계자인 다니가키 사다카즈나 개인적인 친분이 깊던 아소 다로 대신 아베를 지지했다.

하지만 아베는 당선 이후 자신과 굉지회의 이념은 차이가 있다며 고가와 거리를 두었다. 반면 니와는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이 되었는데 관례에 따라 니와가 파벌을 잠시 이탈하자 고가는 니와·고가 공동 대표 체제를 고가 단독 대표 체제로 바꾸었다. 오타 세이이치 등 간부와 소장파 의원들의 지지를 얻은 고가는 당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한 뒤에도 파벌의 실권을 계속 쥐었다.

총재 선거에서 다니가키를 지지했다. 그런데 굉지회 소속의 오노데라 이쓰노리가 입후보를 모색하다가 고노 다로 지지로 선회하고 스가 요시히데는 아예 굉지회를 이탈하면서까지 고노 지지를 표명하여 고가의 리더십에 타격을 줬다.

2012년 총재 선거를 앞두고 다니가키는 지방선거와 참의원 의원 선거 승리를 기반으로 총재 재선을 희망하며 고가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가는 세대 교체를 주장하며 다니가키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표명했다. 결국 다니가키는 간사장 이시하라 노부테루의 출마를 이유로 총선에 불출마했고 고가의 반응에 분노하여 굉지회를 이탈해 새로운 파벌인 유린회를 만들었다.

중의원이 해산된 2012년 11월 16일에 고가는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28] 다음 날에는 자신은 정계를 은퇴하고 지역구는 비서인 후지마루 사토시에게 물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파벌 회장직은 기시다 후미오에게 양도한 뒤 명예 회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어느 정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2020년 9월 말에 명예 회장직에서 사임하면서 완전히 정계를 떠났다. 2020년 총재 선거 당시 고가와 불화를 빚고 있던 아소는 기시다에게 고가와의 관계를 청산할 것을 요구했지만 기시다는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29] 분노한 아소는 총재 선거 때 기시다가 아닌 스가를 지지했고 스가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이는 파벌 내에서 기시다가 고가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불러일으켰고[30] 고가가 기시다 정권을 실현하기 위해 리스크가 커진 것 같다며 스스로 사임했던 것이다.[31]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는 대(大)고치카이 구상이 있다. 이는 과거 고치카이의 흐름을 잇는 고가파와 타니가키파와 아소파가 재결집하는 구상이다. 또한 아소파를 제외한 형태로 고가파와 타니가키파가 재결집하는 중(中)고치카이 구상도 있다. 고이즈미 정권, 아베 정권 시대에는 정권과의 거리감으로 세 파벌이 일치하지 않았고, 같은 파벌 내부에서도 차이가 컸기 때문에 구상은 진전되지 않았지만, 후쿠다 정권 탄생에 즈음하여 고가는 타니가키와 함께 후쿠다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그 결과 대체로 두 파벌 내부가 결속되었다.

2008년 1월 16일에 고가파·타니가키파가 합류에 정식 합의, 5월 13일의 파티에서 정식 합류가 이루어졌다. 합병 후의 고치카이는 중의원 50명, 참의원 11명의 총 61명의 의원이 참가하여, 당내 최대 파벌인 마치무라파 (세이와 정책 연구회, 중의원 60명, 참의원 26명/총 86명), 제2 파벌인 쓰시마파 (헤이세이 연구회, 중의원 47명, 참의원 22명/총 69명)에 이은 제3 파벌이 되었다. 합류에 따라 구 고가파에서 고가가 회장, 오타 세이이치가 회장 대행에 취임. 타니가키파에서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넘버2 포스트인 대표 간사로, 아이자와 이치로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많은 언론에서는 중고치카이를 '''고가파'''라고 칭하고 있다. 2009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대패로 고치카이 소속 중의원 의원은 25명으로 격감했지만 (그 후의 총재 선거에서 스가 요시히데가 탈퇴하여 24명이 됨), 세이와 정책 연구회와 헤이세이 연구회의 당선자는 그것을 밑돌았기 때문에, 고치카이는 중의원에서 최다 자민당 파벌이 되었다.

2. 2. 3. '저항 세력'의 대표 주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일본도로공단을 민영화하고자 하자 노나카 히로무, 가메이 시즈카 등과 함께 격렬하게 반발하여 '저항 세력'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도로족의원이었던 고가는 도로특별재원의 일반재원화에도 반대했다.[26] 고이즈미는 재무대신이나 외무대신 등 요직을 대가로 고가를 포섭하려는 시도도 했다.

2. 2. 4. 2009년 총선 패배와 이후

2009년 도쿄도의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고가가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실무를 맡았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민당이 민주당보다 열세에 놓였고 총선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고가는 히가시코쿠바루 히데오 미야자키현지사에게 입후보를 요청했으나, 히가시코쿠바루는 전국지사회가 주창한 지방분권개혁 실시와 자신을 자민당 총재 후보로 옹립을 조건으로 제시했고, 고가의 애매한 답변은 당내외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26]

결국 도의회 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민주당에게 제1당의 자리를 내주는 대패를 당했고, 히가시코쿠바루도 총선에 불출마했다. 고가는 책임을 지고 선대위원장직 사임을 발표했지만, 아소 다로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한 다음 날 고가를 선거대책본부장 대리로 임명하여 사실상 유임시켰다.

총선에서 자민당은 유례없는 참패를 당했다. 고가는 후쿠오카현 제7구에 출마, 민주당의 노다 구니요시 후보와 맞붙었다. 노다는 과거 고가의 비서로 7년을 일하고 4선 야메시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고가는 비례대표 중복입후보를 포기하고, 공명당의 전면적인 협력을 얻어 승리하여 10선 의원이 되었다.[27] 하지만 아소가 선거 참패를 이유로 사임하자 고가도 선대본부장 대리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고가는 파벌 회장직을 유지하며 총재 선거에서 다니가키 사다카즈를 지지했다. 그러나 굉지회 소속의 오노데라 이쓰노리고노 다로 지지로 선회하고, 스가 요시히데는 아예 굉지회를 이탈하면서까지 고노 지지를 표명하여 고가의 리더십에 타격을 줬다.

2. 3. 정계 은퇴 (2012)

고가 마코토는 2012년 11월 16일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28] 다음 날, 자신의 비서인 후지마루 사토시에게 지역구를 물려주고 파벌 회장직은 기시다 후미오에게 양도한 뒤 자신은 명예 회장에 취임할 것을 발표했다.

자민당정권 탈환이 유력했던 2012년 총재 선거에서 다니가키 사다카즈는 재선을 목표로 고가에게 협력을 요청했으나, 고가는 세대 교체를 주장하며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다니가키는 불출마를 선언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의원들이 고치카이를 이탈하면서 나카 고치카이는 사실상 종료되었다.[6]

이후에도 파벌 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2020년 9월 말 명예 회장직에서 사임하며 완전히 정계를 떠났다. 2020년 총재 선거 당시 아소 다로는 기시다에게 고가와의 관계 청산을 요구했지만, 기시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9][7] 아소는 기시다를 지지하지 않았고, 스가 요시히데가 당선되면서 파벌 내에서 고가와의 거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8] 고가는 "기시다 정권 실현을 위해 리스크가 커진 것 같다"며 스스로 사임했다.[31][9]

3. 정책 및 주장

3. 1. 야스쿠니 신사 문제

고가 마코토는 2세 때 부친을 전쟁터에서 잃은 전몰자 유족으로, 국회의원이 된 후 야스쿠니 신사 총대를 경험했고, 2002년부터 일본 유족회 회장으로서 전몰자 유족 구제 활동을 하고 있다.[10] 그러나 역사 인식 및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등의 공식 참배 실현을 요구하는 입장과 중국과의 관계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2005년 6월 11일에는 "(야스쿠니 참배에는) 주변국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발언하여 비판이 쇄도하자 "사견으로서 말했다"고 해명해야 했고, 이를 계기로 야스쿠니 신사 총대 직을 사임했다. 이는 1986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중단한 것에 항의하여 국가 기본 문제 동지회를 발족했을 때 대표 간사로서 회에 참가했던 그의 과거 언동과 모순된다.[10]

2005년 10월 17일에는 "추계 예대제의 첫날에 참배해 주신다는 것은 전국 전몰자 유족, 그리고 유족회에게 매우 기쁜 일이다. 유족회로서 8월 15일의 종전의 날 참배에 얽매이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7년 미에현 쓰시에서 열린 강연에서 A급 전범 합사 문제에 관해 "총리의 공식 참배만으로 충분한가. 천황 폐하를 포함해 국민 모두가 참배할 수 있는, 거리낌 없는 시설을 남겨야 한다"고 말하며, 천황의 참배 실현을 염두에 두고 A급 전범 분사를 포함한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표명했다.[10]

이시하라 신타로와는 천황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추진하고, A급 전범의 합사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2010년 10월 추계 예대제에 즈음하여, 모두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회장으로서 초당파 의원 65명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센카쿠 열도 중국 어선 충돌 사건으로 중일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와중의 참배에 대해서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인식을 보이며, "주변국이 어떤 상황에 있든, 일본 고유의 정신 문화 시설을 국회의원이 참배하지 않고서는 국가의 주권도 없고 국가도 없다"고 말했다.

도쿄 재판은 전승국의 보복 재판이라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11] 다만, 국민을 전쟁에 끌어들인 것에 대한 당시 국가 지도자의 책임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3. 2. 중국과의 관계

고가는 친중파의 일원으로 여겨지며, 야스쿠니 문제 등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2007년 7월 4일, 중국의 왕이 대사와 중국 대사 공저에서 간담회를 갖고 협력을 요청했다. 일중 국교 정상화 35주년에 맞춰 일본과 중국이 추진하는 '2만 명 교류' 프로젝트가 그해 가을에도 달성될 것에 맞춰, 양측에서 기념식을 개최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12] 또한, 같은 해 참의원 선거 후에는 모리 요시로, 니카이 도시히로 등과 새로운 일중 우호 의원 연맹 결성을 예정하고 있다고 보도되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 외에도, 고가는 베이징 올림픽을 지원하는 의원회에서 부회장을 맡았다(같은 직책은 20명).

2006년에는 난징 대학살 기념관을 방문하여 헌화를 했다.[13]

3. 3. 헌법 개정 논의

헌법 개정에 대해, "9조는 세계 유산이다. 9조에 자위대를 명기하는 같은 당의 개헌안에 대해서도 '쓸 필요가 없다'"라고 언급하고 있다.[18] 2013년에는 신문 아카하타와의 인터뷰에서 아베 신조가 추진하려는 헌법 96조 개정에 반대하며 비판했다.[19]

3. 4. 기타 정책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에 찬동한다.[20]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와는 구조개혁에 대한 반대 등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와시즘』에서 대담을 한 적이 있다.

2021년 9월, JNN "보도 특집" 인터뷰에서, 아베 신조아소 다로의 이름을 거론하며 "(새 총재가 되는 과정에서 기시다 후미오가 지지를 받았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면, 저는 본말전도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2022년 5월, JNN "보도 특집" 인터뷰에서는, "어쨌든 힘으로 평화가 실현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산을 늘리는 등 그렇게 간단한 일로 일본이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언급했다.

4. 논란 및 비판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회차직책선거구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80년 총선거36회중의원 의원후쿠오카현 제3구자유민주당85,822표18.5%1위당선중선거구제
1983년 총선거37회중의원 의원후쿠오카현 제3구자유민주당76,766표16.4%1위당선중선거구제
1986년 총선거38회중의원 의원후쿠오카현 제3구자유민주당96,950표20.2%1위당선중선거구제
1990년 총선거39회중의원 의원후쿠오카현 제3구자유민주당91,463표18.1%1위당선중선거구제
1993년 총선거40회중의원 의원후쿠오카현 제3구자유민주당94,366표20.2%1위당선중선거구제
1996년 총선거41회중의원 의원후쿠오카현 제7구자유민주당90,432표42.24%1위당선
2000년 총선거42회중의원 의원후쿠오카현 제7구자유민주당124,024표58.13%1위당선
2003년 총선거43회중의원 의원후쿠오카현 제7구자유민주당119,837표63.55%1위당선
2005년 총선거44회중의원 의원후쿠오카현 제7구자유민주당112,420표54.1%1위당선
2009년 총선거45회중의원 의원후쿠오카현 제7구자유민주당128,137표55.03%1위당선


6. 소속 단체 및 의원 연맹


  • 한일 해저 터널 연구회 고문을 맡고 있다.
  • 베이징 올림픽을 지원하는 의원 모임 부회장을 맡고 있다.
  • 트럭 수송 진흥 의원 연맹 회장을 맡고 있다.
  • 천황 폐하 즉위 20년 봉축 국회의원 연맹 상임 간사를 맡고 있다.
  • 한일 의원 연맹에 소속되어 있다.
  • 예외적으로 부부의 별성을 실현하는 모임에 소속되어 있다.

참조

[1] 문서 第2次橋本内閣では小泉は厚生大臣として、古賀は運輸大臣でそれぞれ入閣しており関係は悪くなかった。
[2] 문서 この理由として本人は「野党と同じこと(反対票を投じること)はできない」と述べている
[3] 문서 これまで選挙対策総局長という名称であったが、総裁直属の役職へ格上げし名称を変更し、自由民主党執行部|党三役とほぼ同格の地位となった。
[4] 뉴스 産経新聞 2007-09-24
[5] 뉴스 自民・古賀誠氏が10選、元秘書破る https://web.archive.[...] 2011-03-06
[6] 웹사이트 古賀誠氏後継、秘書で調整 http://kyushu.yomiur[...] 読売新聞 2012-11-16
[7] 뉴스 岸田派が古賀氏を名簿から削除へ 岸田氏「自立」アピール https://www.sankei.c[...] 2022-12-07
[8] 뉴스 自民党 古賀氏、名誉会長退く意向 岸田派、分裂の懸念 https://mainichi.jp/[...] 2020-10-25
[9] 뉴스 自民・古賀氏が岸田派名誉会長辞任の意向 講演で表明 https://www.nikkei.c[...] 2022-12-07
[10] 뉴스 靖国問題:「遺族会でA級戦犯分祀の勉強会」…古賀会長 http://mainichi.jp/s[...] 2007-10-06
[11] URL http://www.bsfuji.tv[...]
[12] 뉴스 毎日新聞 2007-07-05
[13] 뉴스 古賀氏、日中友好を強調 南京虐殺記念館を訪問 https://web.archive.[...] 47NEWS 2013-05-26
[14] 뉴스 自民・古賀選対委員長「道路族に誇り」 http://www.nikkei.co[...] 2008-01-27
[15] 뉴스 自民・古賀氏 「道路族と呼ばれるいわれはない!」 https://web.archive.[...] 2008-07-03
[16] URL http://www.tokyo-np.[...]
[17] 블로그 福岡での出来事――無駄な公共事業の典型「誠橋」を視察 http://katsuya.weblo[...] 2008-10-20
[18] 웹사이트 時事ドットコム「憲法9条は世界遺産」=自民・古賀氏、改正反対の著書出版 https://web.archive.[...]
[19] 뉴스 96条改憲に大反対 元自民党幹事長 古賀誠さん 2013-06-02
[20] 웹사이트 民法の一部を改正する議員立法案~例外的夫婦別姓制度 http://www.noda-seik[...] 2002-07-24
[21] 웹사이트 「喫煙天国」の自民党 部会で吸い放題 分煙論議への機運乏しく http://www.business-[...] 2008-08-19
[22] 뉴스 「吸うなら出て行け」自民・河野氏、政権構想会議で司会 http://www.asahi.com[...] 朝日新聞社 2021-09-29
[23] 웹사이트 日本大学商学部校友会 役員名簿 http://nichidai-bus-[...]
[24] 뉴스 九段会館の天井崩落事故 遺族ら業務上過失致傷で告訴 https://web.archive.[...] 2011-05-13
[25] 뉴스 元会長らの立件見送り 九段会館の天井崩落事故 https://www.nikkei.c[...] 2024-02-26
[26] 뉴스 産経新聞 2007-09-24
[27] 뉴스 自民・古賀誠氏が10選、元秘書破る http://www.yomiuri.c[...] 2024-02-18
[28] 웹인용 古賀誠氏後継、秘書で調整 http://kyushu.yomiur[...] 読売新聞 2024-02-18
[29] 뉴스 岸田派が古賀氏を名簿から削除へ 岸田氏「自立」アピール https://www.sankei.c[...] 2024-02-18
[30] 뉴스 自民党 古賀氏、名誉会長退く意向 岸田派、分裂の懸念 https://mainichi.jp/[...] 2024-02-18
[31] 뉴스 自民・古賀氏が岸田派名誉会長辞任の意向 講演で表明 https://www.nikkei.c[...] 202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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